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바오로 2세 (문단 편집) ==== 광주와 소록도 방문 ====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을 위한 1984년 방한 당시 첫 공식 일정은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방문 일정이었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공식 행사인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광주공항]]에서 미사 장소인 [[광주무등경기장]]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공항에서 경기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5.18 민주화운동]]의 핵심 지역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전라남도청]]과 [[금남로]]를 들른 후 무등경기장으로 갔다. 참고로 광주 지도를 보면 이 방문 경로는 최단경로가 아니며 광주시내를 빙 둘러가는 길이다. 특히 교황이 이 경로를 동선으로 쓰는 것을 전두환 정부가 극렬히 반대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불과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다, 하필이면 방문 시점이 5월이었고, 교황이 가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전라남도청]]과 [[금남로]]가 5.18을 상징하는 지역이었기에, 신군부 인사들이 실권을 잡던 [[전두환 정부]] 입장에서는 교황의 [[광주광역시|광주시내]] 이동이 상처 받은 광주시민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5.18이 전두환 정권의 주장대로 반란세력 진압이 아닌 국민에 대한 탄압과 무력진압이라는 걸 다시 한번 전 세계에 공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 광주에서는 교황에 대한 환영 퍼레이드만 열렸을 뿐 시민들의 반대 시위는 없었다. 당시 교황이 이 경로를 택한 것은 교황청과 [[김수환]] 추기경이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한 덕분이다. 그 시절 대한민국 군사정권은 민주화 운동의 지원자 역할을 했던 한국 천주교회를 눈엣가시로 생각했고 천주교를 향해 압박과 반대를 거듭했다. 물론 교황청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71년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때 김수환 추기경이 강론에서 [[박정희]]의 [[대한민국 제4공화국|유신독재 장기집권]]을 우려하는 메시지를 보내자 박정희가 득달같이 KBS로 전화해서 미사 중계 중단을 지시했다. 아울러 이에 그치지 않고 교황청에 투서를 넣어 김수환 추기경의 직위해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교황청은 분노한 박정희의 투서를 소 닭 보듯 씹었고 김수환 추기경은 원만히 사목 활동을 이어갔다. 박정희의 투서도 가볍게 씹은 교황청이었기에 전두환의 교황 광주 방문 방해 역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전담도청 앞과 금남로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1980년 5월 이후 처음이었다. 201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광주 방문 기념비가 [[무등경기장]] 주경기장 터에 세워진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 외야 밖에 설치되었다. 또한 교황은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을 보여달라”'''며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록도]]를 방문하여 [[한센병]] 환자들의 머리에 일일이 손을 얹고 “친히 고통을 겪으셨던 [[예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라고 격려하고 축복했다. 지금은 소록대교를 통해 녹동항과 연결되지만, 소록도는 요한 바오로 2세 방문 당시인 1984년까지만 해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의 교통수단인 배를 같이 타지 않았을 뿐더러 필요한 물자를 나르는 선박의 선착장이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한센병 환우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던 곳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